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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의 시작,경주의 아름다운 관광명소

1. 문무대왕릉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돌아가신 이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내가 죽은 뒤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라.(중략) 내가 숨을 거둔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동해에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 뿌려달라고 했고 유언에 따라, 신라 사람들은 동해의 큰 바위섬에 장사를 지냈고 그 바위를 대왕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멀리서 보면 평범한 바위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여 있다. 유골을 안장한 곳이 아니라 유골을 뿌린 ‘산골처’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도왔던 당나라의 위협 사실을 알고, 8년에 걸쳐 당나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 기울였다. 또한, 왜적의 동해 침입을 걱정하여 죽어서도 용왕이 되어 동해바다를 수호하겠다는 호국정신은 신라인의 마음 속 깊이 남아 설화에도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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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은사터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있는 바와 같이, 이 절의 금당(金堂)은 부왕이 죽은 뒤 그 화신인 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신문왕이 건립한 것 같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地表)에는 원형 주좌(柱座)가 각출(刻出)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楚石)과 대석(臺石)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다. 중문터와 회랑터의 남쪽 절반 및 금당터의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터 북쪽 절반과 강당터는 민가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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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남주상절리

양남 주상절리란?
마그마에서 분출한 1000℃ 이상의 뜨거운 용암은 상대적으로 차가운 지표면과 접촉하는 하부와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는 상부에서부터 빠르게 냉각된다. 빠르게 냉각하는 용암은 빠르게 수축하게 되어 용암의 표면에는 가뭄에 논바닥이 갈라지듯이 오각현 혹은육각형 모양의 틈(절리)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냉각수축 작용으로 생긴 틈이 수직한방향으로 연장되어 발달하면 기둥모양의 틈이 생기게되는데 이를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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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산인 불국사의 말사이다.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1863년(철종 14)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113칸이 불타 없어졌다.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宋廷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이다. 다행히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 등의 중요한 문적(文籍)과 근세조선 역대 왕의 어필(御筆) 등이 병화(兵火)를 입지 않고 보관되어 있다.이 밖에 목탑지(木塔址), 3층석탑, 오백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214) 등이 있고,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 삼신불(三神佛: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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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골굴사

기림사 골짜기에 위치한 골굴사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다.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다.
눈·코·입의 처리에서 형식화가 뚜렷이 진행되고 있으며, 평판한 신체, 직선적인 신체 윤곽선,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무릎의 물결식 옷주름, 어깨의 V꼴 옷주름 등에서 9세기 후반의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보물 제581호로,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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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견대

이견대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문무대왕릉을 곧바로 바라 볼 수 있는 곳으로 감은사를 완공한 신문왕이 이곳에서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마음을 합해 내려준 보물인 만파식적을 얻은 곳이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던 문무왕이 동해에 홀연히 나타나자, 그 해안의 언덕 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견정’이라는 제법 큰 정자가 있는데, 1979년 정부에서 대지에 남아 있던 초석들을 근거로 새롭게 건립하였다.
이견대 아래쪽에는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면서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시를 쓴 우현 고유섭(1905~1944, 미술사학자)의 기념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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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감포해수욕장

넓은 백사장의 잔잔한 모래와 동해의 청정해역, 여유있는 주변 공간과 인근의 갖은 편의시설이 있고 동해의 바닷물을 이용하여 온천을 즐길 수 있는 해수탕이 있어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고, 해수탕 옆은 주차공간과 송림이 개방되어 있다. 또한,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다.
* 백사장 - 길이 0.5㎞, 폭 40∼9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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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불국사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인들은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강한 자부심, 또는 불국토를 신라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염원이 간절했다.
이와 같은 신라인의 강한 신앙심은 발달한 과학 기술과 뛰어난 건축술, 예술적 감수성에 힘입어 현실화되었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불국사이다.
그중에서도 석가탑과 다보탑은 단연 불국사 건축의 백미로 단아한 석가탑과 화려한 다보탑의 모습은 “불국사 사상과 예술의 정수요, 불교의 이념을 구현시키고자 노력한 신라 민족혼의 결정”으로 찬미 되고 있다.
또한, 토함산 정상부에 있는 석굴암은 전체적인 설계와 공간 배치에서 수학적인 비례 배분과 과학적인 자연통풍, 온도 및 습기 조절, 예술적인 모든 조각의 완성도, 불교 사상에 근거한 설계 등 수리학과 기하학, 건축학, 예술, 종교적 안목과 높은 과학기술이 총체적으로 결합, 완성된 작품으로서 세계도 그 우수성을 인정하여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토함산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느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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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석굴암

신라의 황금기를 구가한 시절로 평가받고 있는 경덕왕(742~765)때에 수많은 불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시작된다. 석굴암, 불국사의 창건, 황룡사 종,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등등. 그 숱한 불사 가운데에 최고의 정점을 꼽는다면 단연 석굴암이다. 석굴암(본래 석불사)의 석실 안에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와 여러 제자와 보살들이 그 깨달음의 순간을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구현돼 있다. 비록 석실 안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속속들이 볼 수 없지만, ‘깨달음’을 향해 집중된 순간의 긴장감은 1200년이 넘는 까마득한 시간이 지난 마당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 시대의 작품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과 표정이 담기게 마련이라고 한다. 본존불을 비롯하여 주변의 보살과 제자들의 형상은 부처의 설법을 듣고자하는 신라인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신라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들어선 석굴암에서는 깨달은 순간의 고요와 부처의 절대 미소에 매혹당해, 석굴암 벽 한켠에 보살이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자신도 모르게 붙박히는 경이로운 체험이 어렵지 않다.
석굴암의 불상 배치
인도의 석굴 양식을 본떠 만들었으나 자연적으로 생기거나 파서 만든 석굴이 아니라 360여 개의 돌을 짜맞추어 내부 공간을 만든 뒤 흙으로 덮어 굴처럼 보이게 만든 인공 석굴이다.
여기에 석굴암의 건축학적 우수성이 드러난다. 내부는 네모난 전실과 원형의 주실, 두 공간으로 크게 구분된다. 모두 40구(2구 분실)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칭 상태로 배열되어, 완벽한 균형감과 안정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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